5살에 이모할머니께서 한국 최초의 영어교재, 시사영어사의 English the Happy Way를 출간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의 영어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모할머니가 출간기념으로 아버지에게 선물을 해주셨고,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저와 형의 영어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어찌보면 5세에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그리 특이한 경우가 아니지만, 80년대 초에만 해도 전국에서 손꼽힐정도로 드문 경우였을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대학을 입학하던 시기엔 시각장애인이어서 대학 입학시험조차 보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디 앞도 못보는 병신이 대학을 가겠다고..."
그러한 멸시를 받았지만
연세대 신학과 총장이신 할아버지께서 자기 자식이니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셔서 오직 연세대만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당시 초인기학과인 영문학과에 2등으로 입학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께 직접 영어를 배웠으므로 당시 학교에서는 아버지께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도 많았고, 저역시 영어를 잘 하는 아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청주맹학교에 선생님으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장애인 컴퓨터 보급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관련 컴퓨터 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으로 공부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바다를 건너 미국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저는 형과 함께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시는 고모와 함께 몇년 더 생활하며 영어와 외국문화를 경험하였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에는 학생들이 해외로 어학연수도 많이 다녀오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입할할 때만 해도 미국에서 살다왔다는 것만으로도 아직도 많은 관심을 받는 시기였죠.
미국에서 살다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외국인 전형등으로 남들보다 쉽게 대학에 들어오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검정고시를 거쳐 수능을 보고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한양대에 입학했습니다.
4년간 몸담았던 한양대 미식축구부
대학교 재학중 군대는 카투사 만기제대를 하였고 영어실력때문에 의무병으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특이하게 치과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장교 5명에 미군과 카투사 통틀어 10명의 사병이 근무하는 곳으로, 웬만한 카투사보다 더욱 영어를 많이 써야 하는 환경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릴 때 미국 학교에서 쓰는 영어와 성인이 되어 미군이라는 조직에서 쓰는 영어를 경험한 점 또한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영어때문에 입사후 보직도 영어를 많이 써야하는 해외영업부에서 근무하였습니다.
회사 모든 선박의 급유(BUNKER)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수시로 외국인과 영어로 통화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아야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영어를 많이 쓰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원어민이 아닌 저와같은 아시아인, 유럽인, 아프리카인등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일상에서 쓰이는 영어가 아닌, 진정으로 외국인끼리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를 경험하는 것도 훗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큰 경험이 되었습니다.